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출세 목적 교육/문제 해결이 어려운 이유 (문단 편집) == 역사적 배경 ==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미군정, 6.25를 겪으며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고, 국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다 나라는 가난하고 힘없지, 기술은 뒤쳐져 있지, 땅에선 기름 한방울 안나지, 관광자원같은걸로 먹고 살 수도 없는 땅덩어리에 주변에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같은 한국보다 국력이 월등한 나라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국민은 문맹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범국민'적인 '산업화' 교육을 통해 [[문맹]]을 '산업 현장에서 초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이에는 [[주입식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또 고학력층을 만들어내어 주변국들을 지식 산업에서 이겨야 했으므로 입시위주 교육을 통해 경쟁시키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거기에 지리적 및 문화적으로 비슷하면서 초고성장을 기록하던 일본의 교육체계가 아무래도 정부가 한국에 적합한 교육제도를 찾는 것보다 이미 성공 사례를 보인 일본을 따라가는 것이 비용으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훨씬 쉽고 간편했고 당시 경제적 상황이 한 학급에 80명씩, 학년당 20개씩은 될 정도니 개인별로 맞춰서 교육시킬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인 중국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당시 독재 체재로도 이만큼 안전하게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든 것도 작용했다. 창의성을 길러서 국가에 비판의식을 기르는 것보다는 당장 제조업에 필요한 산업역군을 키우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한국의 산업화와 정치적 상황,국가의 경제상황, 지리, 문화적으로 가까운 일본의 빠른 고성장의 선례, 대치상황, 대학이라는 구조상황을 고려하면 국민 전체의 빠른 교육이 필요했기에 입시위주 교육을 채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 한국의 근현대 입시위주 교육은 '''국민의 빠른 산업화 적응'''이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했고, 이는 '''[[성공적]][[한강의 기적|이었다.]]''' 이로 인해 규모의 경제도 어느 정도 확립이 되었고, 고도화된 정보화 기술면에서 떨어지는 편은 아니다. 반도체나 휴대폰 같은 소수 고부가가치 정보산업에 투자해 성과를 냈다. 하지만 국민 전체의 사회적응 및 지식은 어느 정도 유지하지만,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고도의 지식은 모두가 얻을 수는 없으므로 선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는 것은 물론, 이를 지식에서 생산기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실패도 어느 정도 사회가 떠안아야 한다. 하지만 입시위주 교육은 철저하게 효율과 대단위 생산에 치중해있으므로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산층, 서민 복지 약화로 인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이상으로 인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는 것. 90년대까지 입시위주 교육을 받고 자란 지금의 30대 이상 학부모들은 당연히 '''[[보상심리|자기가 배웠던대로 자식에게 대물림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학벌 [[카르텔]]이라는 왜곡된 형태로 더욱 공고해지게 된 것. 이렇다 보니 입시위주 교육의 문제점이 수십년 이상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같은 시험에 목을 매는 이유가 과거 한국 사회는 집성촌을 기반으로 한 씨족사회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마을에서 장원급제자가 나오면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장원급제자를 방패 삼아 부정부패 등 나쁜 짓들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지금도 행정고시 등 고시에 합격하면 시골 동네에서 현수막 걸리고 동네 잔치 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한다.[* [[http://bizworld.tistory.com/727|장원급제후 동네 잔치 여는 까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